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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클리온, 크레타의 관문 (미노아, 항구, 요새)

by 지식나라 2025. 7. 4.

바다를 지키는 쿠레스 요새 항구에 정박한 작은 어선들

그리스 크레타 섬의 중심 도시 에라클리온(Heraklion)은 고대 문명의 뿌리와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라는 두 가지 얼굴을 지닌 도시입니다. 미노아 문명의 대표 유산인 크노소스 유적과 함께, 베네치아 시대 항구와 요새 구조물까지 다양한 시간대의 흔적이 공존합니다. 이 글에서는 미노아 문명, 지중해 무역의 중심 항구, 그리고 중세 요새 도시로서의 에라클리온을 중심으로, 이 도시가 품은 깊은 역사와 매력을 소개합니다.

미노아 문명의 유산, 크노소스 궁전

에라클리온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유산은 단연 크노소스 궁전(Knossos Palace)입니다. 기원전 2000년경 건설된 이 궁전은 미노아 문명의 중심지였으며, 유럽 최초의 고등 문명으로 평가받는 미노아인의 정치, 종교, 문화가 집약된 공간입니다. 크노소스 궁전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미궁(labyrinth) 구조로 잘 알려진 전설적 공간입니다. 미노타우로스의 신화가 이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복잡하게 얽힌 방 구조와 다층적인 공간 배치는 당시 기술력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벽화, 도자기, 배수 시스템 등은 당시 사람들의 삶의 수준을 짐작하게 하며, 현재 유적지에서는 복원된 일부 벽화와 컬러풀한 기둥 장식도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의 에라클리온은 고고학 박물관과 함께 크노소스 유산을 체계적으로 보존·해석하고 있어, 방문자는 단순한 유물 이상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박물관에서는 크노소스에서 출토된 정교한 장신구, 진흙판 문자(Linear A, B), 종교적 도상 등을 통해 고대 문명의 정교함과 신비로움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중세 이후, 무역과 방어의 거점 항구

에라클리온은 고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해왔습니다.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 하에 있던 시기(13~17세기)에는 칸디아(Candia)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지중해 무역과 군사 방어의 핵심 항구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이 시기 건설된 베네치아 항구(Venetian Harbour)는 오늘날에도 주요 관광 명소이며, 항구에 정박한 고기잡이 배들과 옛날식 돌부두가 전통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항구 끝에는 웅장한 쿠레스 요새(Koules Fortress)가 자리하고 있어, 당시 도시 방어 체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두꺼운 석벽과 성루에서 바라보는 지중해는 중세 해상 왕국의 흔적을 되새기게 합니다. 이 외에도 항구 근처에는 베네치아 시청사, 로기아(시장 건물) 등 중세 건축물이 여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이들은 지금도 시청, 문화공간, 전시장 등으로 활용되고 있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에라클리온의 항구는 단순한 수산시장이나 풍경이 아닌, 다층적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입니다.

도시를 지킨 돌벽, 베네치아 요새 구조

에라클리온 시내를 걷다 보면 도시 중심을 따라 펼쳐진 거대한 석조 성벽과 성문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약 400년간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구축한 도시 방어 체계의 일환으로, 유럽 중세 도시 중에서도 손꼽히는 보존 상태를 자랑합니다. 이 성벽은 약 4.5km 길이에 달하며, 7개의 주요 성문과 9개의 방어 요새가 연결된 구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체손시소 성문(Chandax Gate)이스탄불리아니 성문(Itsandouliani Gate)는 현재도 출입이 가능하며, 성벽 위를 산책로로 활용한 구간도 있습니다. 이는 도시 주민과 여행자 모두에게 역사 위를 걷는 일상적 체험을 제공하는 요소가 됩니다. 에라클리온 성벽의 특징은 그 기능성과 함께 건축적 미학에서도 드러납니다. 두터운 벽면은 단순 방어 목적을 넘어서 조각과 비문, 기둥 장식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방어 도시도 미적으로 설계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도심을 걸을수록 과거가 현재를 감싸 안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이러한 구조물 덕분입니다. 오늘날 에라클리온의 요새 유산은 시민의 일상과 맞닿아 있으며, 역사적 가치뿐 아니라 도시 정체성을 상징하는 심볼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무너뜨리지 않고 지켜낸 성벽은, 에라클리온을 단순한 도시가 아닌 기억의 공간으로 만드는 핵심 요소입니다.

에라클리온은 단순한 지중해 해안 도시가 아닙니다. 미노아 문명의 발상지이자, 베네치아 시대의 요새 도시, 그리고 오늘날 크레타의 문화 중심지로서 다층적인 시간의 결이 공존하는 도시입니다. 고대와 중세, 근대의 흐름이 연결된 에라클리온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역사 교과서입니다. 그리스 여행에서 흔히 지나치는 이 도시를, 이제는 목적지로 삼아볼 가치가 충분한 곳입니다.